한 소녀가 어른이 되면 할 일 세 가지를 할아버지와 약속한다.
이 소녀가 자라 처녀가 되고 노인이 되면서 자신의 꿈이자 약속을 잊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잔잔한 성장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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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어른이 되면 할 일 세 가지를 할아버지와 약속한다.
이 소녀가 자라 처녀가 되고 노인이 되면서 자신의 꿈이자 약속을 잊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잔잔한 성장 그림책.

여자아이들에게 분홍 리본 꿈을 꾸기보다는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경험을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꿈을 꾸는 일이 얼마나 더 가치있고 멋진 일인지를 회화처럼 아름다운 그림과 잔잔한 글에 담아 보여준다.

코 끝 시린 겨울 오후쯤 되었을까, 파란 코트를 입은 꼬마가 커다란 돛단배들로 북적이는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날마다 세수하고 아침밤 먹고서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 이 꼬마가 다른 아이들과 그나마 다른 점이라고 ...

코 끝 시린 겨울 오후쯤 되었을까, 파란 코트를 입은 꼬마가 커다란 돛단배들로 북적이는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날마다 세수하고 아침밤 먹고서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 이 꼬마가 다른 아이들과 그나마 다른 점이라고 굳이 꼬집자면 불꽃 같은 빨간 머리가 주체할 수 없이 곱슬곱슬하고, 늘 머나먼 세상의 꿈을 꾼다는 정도.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남다르게도, 세상 어떤 일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 내라고 하는 “예술가” 할아버지가 있다.

이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에 그 자리를 빼앗겨 버렸지만 한때는 모든 아이들의 “환상의 공급처”였던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이 아이는 이 다음에 커서 돈 잘 벌고 힘센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 아니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위인전이나 영웅담에나 나올 법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을 거침없이 하는 할아버지도 예사 할아버지가 아니지만 손녀도 보통이 아니다. 옷차림새로 보아 19세기, 아무리 늦잡아도 20세기 초반일 시기, 그 당시 대개의 처녀들은 그저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몸치레에만 힘썼을 테지만 미스 럼피우스는 당차게도 직업을 갖고,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세상 여행을 떠난다. 오랜 여행을 끝내고 어린 시절 꿈대로 바닷가 집에 정착하고 나서 머리 희끗희끗해진 초로의 노처녀는, 다른 사람 같으면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살 터이지만,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아 이야기를 듣던 몇십 년 전의 약속을 지키려고 애쓴다.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거창한 일을 백만 장자도,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는 정치가도 아닌 한낱 촌로가 할 수 있는 일일까? 하지만 할머니가 된 미스 럼피우스가 찾은 답은 의외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일이다. 어렸을 적 앨리스로, 그러고서는 미스 럼피우스로 불렸던 그녀는 밤낮으로 마을에 꽃씨를 뿌리고 다니면서 이제 “저 정신 나간 늙은이”로 불리지만, 이듬해 봄 온 마을에 루핀 꽃이 가득하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미스 럼피우스에게 “루핀 부인”이라는 별칭을 붙여 줌으로써 할아버지와의 세 번째 약속을 지켜냈음을 공인해 주고, 미스 럼피우스는 마을의 영웅이 된다. 할머니가 된 루핀 부인의 집에는 옛날 할아버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있다. 할아버지 작업실에 걸려 있던 풍랑 만난 배의 그림은 할아버지 방으로 옮아갔다가 이제는 루핀 부인의 응접실에 자리잡았다. 미스 럼피우스가 여행길에 만난, 낯모를 여행자에게 너무도 친절했던 바파 라자의 집은 할아버지의 그림 속에 나오는 집과 똑같다. 혹시 미스 럼피우스의 할아버지도 어릴 적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아서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라는 이야기를 화두처럼 들었으며, 그리하여 세상을 두루 여행하다가 바파 라자의 조상뻘 되는 이의 집을 지났으며, 나이 지긋해서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찾아 낸 방법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다른 이의 몫으로 넘어간다. 뮤지컬 애니의 주인공처럼 빨간 고수머리를 하고서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화장닌 꼬마-이 선머슴 같은 꼬마의 이름도 앨리스이다-도 씩씩한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을 터이다. 예전에야 세상이 “벌써” 아름다웠으므로 “좀더” 아름답게가 가능했겠지만, 예전처럼 낙관적일 수 없는 세상에서 이 역할을 맡아야 할 아이는 어깨가 버겁다. 이 아이에게 지워진 짐을 더는 것은 특출날 것도 별스러울 것도 없는, 지금 눈 똘망똘망한 미래의 작은 영웅들이 할 몫이다.

저자 : 바버러 쿠니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간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스미스 칼리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판화를 배웠다. 쿠니는 이때부터 그림책을 만들기 시...

저자 : 바버러 쿠니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간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스미스 칼리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판화를 배웠다. 쿠니는 이때부터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여,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제프리 초서의 첸티클리어와 여우>>와 <<달구지를 끌고>>로, 칼데콧상을 두 번 수상했다. 차가운 푸른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평면적이면서도 탁 트이고 밝은 풍경들과, 잔잔하고 세세하고 따뜻한 세부 묘사가 특징인 그이의 화풍은 80년대 들어 완성되었다. 언제나 가녀린 몸매에 언제나 꼭꼭 땋은 금발머리를 하고 있는 단아한 할머니 바버러 쿠니는 메인 주의 바닷가에서 한 시골 의사의 부인으로 살면서, 쉬지 않고 그림책을 만들어, 미스 럼피우스처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하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